공주의 백제 왕릉원 2호 주인..14세 삼근왕

작성 : 2025-06-18 08:34:27 수정 : 2025-06-18 08:45:39
▲ 17일 서울 중구 한국의 집에서 열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조사성과 언론공개회에서 2호분에서 출토한 삼근왕 추정 어금니가 전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무령왕릉 말고는 누가 묻혔는지 알 수 없었던 충남 공주의 백제 왕릉 일곱 곳 중 2호분의 주인이 밝혀졌습니다.

발굴된 어금니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은 만 14세에 죽은 '소년 임금' 삼근왕(재위 477~479)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백제 왕릉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무왕)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공주 백제 왕릉 2호분에서는 정교한 금 귀걸이와 반지, 구슬 같은 유물도 출토됐습니다.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 [연합뉴스]

국가유산청과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2023년 9월부터 사적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을 재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곳은 백제가 웅진(공주)에 수도를 둔 웅진 시기(475~538)의 왕릉 7기가 모여 있는 곳이지만 20세기 초 도굴당한 이후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도굴을 면한 무령왕릉만 1971년 모습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연구소는 2호분 안에 남아 있는 1t 분량의 흙을 구멍이 촘촘한 채반 위에 흙을 놓고 씻어내는 방법에서 어금니로 보이는 치아 2점과 뼛조각 일부를 찾아냈습니다.

▲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어금니 [연합뉴스]

법의학 분석 결과 어금니는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백제 웅진 시기, 10대에 죽은 백제 왕은 한 명뿐으로 23대 삼근왕입니다.

삼근왕의 할아버지는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입니다.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도주 중 고구려군에게 피살됐습니다.

삼근왕의 아버지 22대 문주왕(재위 475~477)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백제의 명맥을 이었으나 귀족인 해씨 세력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만 12세에 삼근왕이 즉위하고 해씨의 반란이 진압됐으나, 삼근왕은 곧 사망했습니다.

어려서 죽은 삼근왕은 후사가 없어 개로왕의 직계가 끊기고,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24대 동성왕(재위 479~501)이 즉위했습니다.

2호분의 주인이 삼근왕이라면, 나란히 조성된 1~4호 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개로왕의 직계인 아버지 문주왕을 비롯해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들로 추정됩니다.

개로왕 직계가 아닌 무령왕의 무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어금니와 함께 새로 출토된 부장품은 그 같은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도 수준 높은 백제의 금속공예 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왼쪽은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귀걸이, 오른쪽은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장식 귀걸이 [연합뉴스]

가장 돋보이는 금귀걸이 한 쌍은 길이 6.5㎝로, 한 점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금귀걸이 가운데 부분에선 줄무늬 장식이 새겨진 그물 모양의 씌우개 안에 청색 유리옥을 넣은 정교한 금세공 기술이 드러납니다.

▲ 왼쪽은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반지, 오른쪽은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반지 [연합뉴스]

2호분에서 함께 출토된 직경 1.9㎝의 반지는 은에 줄무늬를 새기고 금실 5개를 이어 붙은 것처럼 금으로 도금한 것입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신라 반지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당시 백제와 신라의 교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함께 수습된 유리옥 1,000점 중 황색·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산지가 태국인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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