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이]은퇴 후 '낭만가객' 변신한 정철수 씨(1편)

작성 : 2025-09-13 09:30:01
30여 년 이삿짐센터, 업계 '넘버 2'
'일 중독'에 빠져 해외여행 한번 못가
예술단 만들어 공연봉사로 보람 찾아
"노래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죠"

▲ 정철수 대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전 TV광고로 유명했던 카피 문구처럼 은퇴 후 노년을 낭만적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로 211 '무지개 예술공연단' 정철수 대표.

올해 75살인 그는 매일 아침 봉고차에 음향기기 등 공연장비를 싣고 단원들과 함께 요양병원이나 공원, 축제장 등 행사장소로 달려갑니다.

이는 공연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순수한 재능기부 봉사활동.

지난해 9월 발족한 무지개 예술공연단은 15명의 단원을 중심으로 난타, 장구, 색소폰연주, 한춤, 민요, 트로트 등 실버세대들이 좋아하는 레퍼토리로 흥겨운 공연을 펼칩니다.
◇ 평소 노래를 좋아해 지역가수로 활동
그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평소 노래를 좋아해 지역가수로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비영리단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연단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음향기기와 봉고차를 구입하느라 자비 5천만 원 가량을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일'에 열심인 이유에 대해 그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껴서 소일거리 삼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 '무지개문화예술단' 단원들

그가 이토록 '흥'에 빠져든 배경에는 젊은 시절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전남 영광군 군서면에서 자란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19살에 광주로 올라와 공장에 취업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포마이카 가구를 제작하는 공장이었습니다.

견습공으로 들어가 '꼬마'로 불리며 힘들게 사포질을 하던 그는 1년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칠판, 교탁 등 학교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교구제작사로 일터를 옮겼습니다.
◇ 성실히 일해 31살에 공장장에 올라
이곳에서 성실히 일한 결과 29살에 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 2년 후에는 공장을 총괄하는 공장장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5년 후 36살이 될 무렵 오너의 2세들이 들어오면서 그는 부득이 공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막막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이삿짐센터였습니다.

퇴직하자마자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용달차를 구입해서 이삿짐 나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40살에 '이사방' 가맹점 상호로 동구 지산동에 직접 회사를 차려서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알선 주선업'으로 불리는 이삿짐센터는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업종으로 성실하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 빛고을노인건강타운 공연
◇ 아파트 붐 타고 사업 날로 번창
당시는 아파트 붐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여서 이삿짐센터가 호황을 맞은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소득수준이 향상되고 아파트 특성상 고층이 많아 포장이사가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습니다.

더불어 그의 사업도 날로 번창해 2004년 회사 사무실을 북구 용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회사규모를 보면 대형탑차 3대, 사다리차 5대, 용달차 16대, 직원 30명을 거느릴 정도로 북적거렸습니다.

한동안 광주권에서 두 번째로 큰 이삿집센터로 발돋움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만의 영업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회사 홍보에 주력했습니다.

이삿짐센터를 연상시키는 '2424' 전화번호를 높은 프리미엄을 주고 구입하고, 전화번호부에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광고를 실어 고객들이 쉽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영업 범위를 넓히기 위해 광주 인근 시·군 마다 전화를 개설해 놓고 착신전환하는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자 '2424' 전화번호를 처분하고 재빨리 웹 광고에 눈을 돌려 고객들을 유치했습니다.

▲ 요양원 공연
◇ 남다른 영업전략으로 업계에서 두각
또한 명절 기간에 견적요청이 들어올 경우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응대해 일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목포와 전주 등 먼 지역까지 달려갔습니다.

뿐만아니라 비수기에 회사가 적자를 보더라도 직원들에 대한 급여는 절대 밀리지 않고 제 때 지급해 신뢰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삿짐센터 일이 힘든 육체노동이다 보니 직원들 부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을 잔뜩 맡아놓았는데 전날까지도 온다고 약속한 직원이 당일 아침 일당이 작다고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 일에만 매달리느라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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